
경북 성주 염농산 제언 공덕비 네이버지도 캡처 *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용정리 292-8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용정리에 있는 염농산 제언 공덕비는 단순한 비석 하나를 넘어 일제강점기 지역사회와 민족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사용한 한 여성의 삶을 증언하는 역사 유산이다. 이 비석은 대구의 명기이자 사회사업가였던 염농산(1859~1947)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으며, 주민들 사이에서는 흔히 앵무 공덕비 또는 앵무빗돌로 불린다. 현재 비석은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용정리 292-8에 자리하고 있다.
염농산은 본래 이름이 경은이었으며, 기생으로 활동할 때는 앵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졌다. 그녀는 대구 경상감영 교방 출신의 관기로 뛰어난 예능과 재능을 인정받아 당대의 명기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그녀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단순히 기생으로서의 명성이 아니라 사회를 위한 헌신이었다. 당시 기생들은 사회적으로 낮은 신분으로 인식되었지만, 염농산은 그러한 한계를 뛰어넘어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고 교육사업과 구휼사업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쳤다. 그녀는 대구기생조합과 달성권번의 대표를 맡기도 하였으며, 자신이 축적한 재산을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였다.
염농산 제언 공덕비가 세워지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성주군 용암면의 홍수 피해였다. 오늘날의 용암면 일대는 넓은 평야지대를 이루고 있지만 당시에는 낙동강과 지류의 범람으로 인해 수해가 자주 발생하였다. 비가 많이 내리면 농경지가 유실되고 농민들의 생계가 위협받았다. 특히 용암면 일대의 들판은 해마다 반복되는 홍수로 큰 피해를 입었고 주민들은 이를 막을 방법을 찾지 못한 채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염농산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이 지역에 석축 제방을 쌓도록 하였다. 이 제방은 흔히 두리방천이라고 불리며, 홍수를 막고 농경지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제방 축조는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대규모 토목사업이었다. 그러나 염농산은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면서도 주민들의 삶을 안정시키기 위해 사업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농토가 보전되고 새로운 경작지가 확보되면서 마을 경제가 크게 개선되었다. 주민들은 그녀의 선행에 깊이 감동하였고, 그 공덕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 공덕비를 세우게 되었다.

경북 성주 염농산 제언 공덕비(적송자)
흥미로운 점은 염농산이 이 사업을 통해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일부 연구에 따르면 그녀는 제방 주변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방천 공사 이후 조성된 토지를 개인 재산으로 확보하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주민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으며, 공동체 전체의 번영을 우선하였다. 이러한 점 때문에 그녀의 행동은 단순한 투자나 재산 보호 차원을 넘어선 공익적 사업으로 평가된다.
공덕비의 형태는 비교적 소박하다. 높이 135센티미터, 너비 44센티미터, 두께 16센티미터 규모의 비석으로 전면에는 큰 글씨로 ‘염농산 제언 공덕비’라는 명칭이 새겨져 있다. 그 좌우에는 그녀의 선행을 칭송하는 사언시가 새겨져 있으며, 후면에는 비를 세우게 된 경위와 공적이 기록되어 있다. 비문의 내용은 두리방천을 축조하여 홍수를 막고 농토를 개간함으로써 백성과 국가에 이로움을 주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주민들에게는 단순한 토목공사가 아니라 삶의 터전을 지켜준 은혜로 받아들여졌음을 알 수 있다.
이 비석의 건립 시기를 둘러싸고는 약간의 논란이 있다. 비문에 기록된 ‘기미오월오일’이라는 표현 때문에 1919년에 세워졌다고 보는 견해가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당시의 사회적 상황을 고려하여 1937년경에 세워졌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정확한 연도는 확정되지 않았지만,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건립된 것만은 분명하다.
염농산의 삶은 단순히 성주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녀는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났을 때 거액을 기부하여 여성들의 참여를 이끌어냈고, 고아원 설립에도 재산을 내놓았다. 또한 민족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학교 발전기금을 기부하는 등 교육사업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당시 여성, 그것도 기생 출신 인물이 사회운동과 민족운동의 전면에 나선 사례는 매우 드물었다. 그래서 염농산은 단순한 기생이 아니라 근대 여성운동가이자 사회사업가, 애국인사로 평가받고 있다.
성주 지역 주민들은 오랫동안 그녀의 공덕을 기억해 왔다. 제방은 ‘앵무방천’이라 불렸고, 제방 덕분에 보전된 들판은 ‘앵무들’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이는 지역민들이 그녀의 이름을 생활 속 지명으로 남길 만큼 큰 고마움을 느꼈음을 보여준다. 다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러한 기억은 점차 희미해졌고, 한동안 공덕비의 존재조차 잊혀지기도 했다. 최근 들어 지역 연구자들과 향토사학자들의 노력으로 염농산의 삶과 공덕비의 의미가 다시 조명되고 있다.
오늘날 염농산 제언 공덕비는 단순한 금석문 유산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이 비석은 한 개인이 자신의 부와 재능을 공동체를 위해 어떻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또한 신분과 성별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회적 책임을 실천한 여성의 삶을 증언하는 귀중한 역사 자료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지역 단체들이 추모제를 열어 염농산의 정신을 기리고 있으며, 그녀의 나눔과 봉사 정신을 계승하려는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결국 성주의 염농산 제언 공덕비는 단순히 홍수를 막은 제방의 공사를 기념하는 비석이 아니다. 그것은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시기에 자신의 재산을 아낌없이 내어 공동체를 구한 한 여성의 숭고한 정신을 담은 기념비이며, 오늘날에도 사회적 책임과 나눔의 가치를 일깨워 주는 살아 있는 역사 교육의 장이라고 할 수 있다. 염농산이라는 이름은 비록 많은 사람들에게 낯설 수 있지만, 그녀가 남긴 공덕비는 한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성주의 들판을 바라보며 공동체를 위한 헌신이 얼마나 큰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묵묵히 전하고 있다.
경북 성주 용암 염농산 제언 공덕비 주소는 다음과 같다.
주소: 경상북도 성주군 용암면 용정리 292-8
이 비석은 흔히 ‘앵무 공덕비’, 또는 ‘앵무빗돌’이라고도 불린다. 염농산은 대구의 유명한 기생이었던 앵무와 동일 인물로, 성주 용암 지역의 홍수를 막기 위해 두리 방천을 축조했고, 주민들이 그 공덕을 기려 세운 비석이다.
현재 비석은 용암면 용정리 292-8, 용암면 행정복지센터 부근에 있으며, 자료에 따라 과거에는 용암파출소 인근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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