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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의성 문익점 면작기념비

great660 2026. 7. 2. 07:13

경북 의성 문익점 면작기념비 네이버지도 캡처 *주소: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동부로 2545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에 위치한 문익점 면작기념비는 고려 말 문신이자 학자인 문익점의 업적과 우리나라 목화 재배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역사 유적이다. 이 기념비는 단순히 한 인물을 기리는 비석이 아니라 우리나라 의생활과 산업, 경제, 생활문화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목화 재배의 역사를 상징하는 문화유산이다. 오늘날 기념비 주변에는 작은 목화밭이 함께 조성되어 있어 방문객들이 실제 목화가 자라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으며, 의성이 우리나라 목화 재배의 중요한 중심지였음을 알리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의성은 문익점의 손자인 문승로가 현령으로 부임하여 목화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고 보급한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러한 역사적 의미 때문에 문익점 면작기념비가 세워졌다.

 

기념비가 자리한 의성 금성면은 조선 초기 목화 재배가 크게 발전한 지역이다. 고려 말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온 이후 일정한 시간이 지나 그의 손자인 문승로가 의성 현령으로 부임하였다. 문승로는 중국 금주성과 의성의 기후와 지형이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하여 이곳에서 목화를 대규모로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의성은 일조량이 풍부하고 토양의 배수가 양호하여 목화 재배에 적합한 환경을 갖추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목화 생산이 빠르게 확대되었다. 의성에서 생산된 목화는 이후 전국으로 보급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으며, 조선 초기 면직물 생산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성장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의성은 문익점의 업적을 계승한 지역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면작기념비가 세워졌다.

 

현재의 문익점 면작기념비는 1935년에 건립되었다. 그 이전에도 문익점의 공적을 기리는 목면유전비가 있었으나, 이후 현재의 위치에 별도의 면작기념비가 조성되었다. 기념비에는 문익점이 목화를 들여온 역사와 그의 후손들이 의성에서 목화를 재배한 과정이 담겨 있으며, 의성 지역의 목화 재배 역사를 상징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기념비는 금성산 고분군 입구 부근에 위치하여 역사 탐방과 문화유산 답사를 함께 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주변에는 목화를 직접 재배하는 작은 체험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 목화의 성장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문익점의 가장 큰 업적은 우리나라에 목화를 처음 본격적으로 전래하고 재배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고려 시대 이전에도 목화에 관한 기록이 일부 존재하지만, 그것은 제한적인 수준이었으며 실제 재배와 보급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문익점은 고려 공민왕 12년인 1363년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파견되었다. 당시 고려는 원나라와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문익점은 사신단의 일원으로 중국을 방문하였다. 원나라에서는 이미 목화 재배와 면직물 생산 기술이 상당히 발달해 있었고, 백성들은 솜으로 만든 옷을 입으며 겨울을 따뜻하게 보내고 있었다. 문익점은 이러한 모습을 직접 목격하면서 목화가 백성들의 생활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는 작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경북 의성 문익점 면작기념비(남평문씨대종회)

 

오랫동안 널리 알려진 이야기에서는 귀국할 때 목화씨를 붓대 속에 숨겨 가지고 왔다고 전해진다. 당시 목화 종자의 반출이 쉽지 않았다는 전승과 함께 문익점이 기지를 발휘하여 몇 개의 씨앗을 붓통 속에 넣어 가져왔다는 이야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한 일화가 되었다. 다만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목화 종자가 실제로 반출 금지 품목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며, 붓대에 숨겨 왔다는 이야기는 상징적 전승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 종자를 확보하여 고려에 들여왔고, 이를 재배하여 보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문익점이 귀국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목화를 직접 심어 보는 것이었다. 그는 장인인 정천익과 함께 시험 재배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처음에는 재배 경험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씨앗이 발아하지 못했고, 겨우 한 그루만 살아남았다고 전한다. 이 한 그루의 목화를 정성껏 가꾸어 씨앗을 얻은 뒤 다시 심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점차 종자의 수가 늘어났다. 처음에는 한 그루에 불과했던 목화가 수십 그루, 수백 그루로 늘어났고, 마침내 여러 지역으로 종자를 나누어 줄 수 있을 만큼 생산량이 증가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단순히 씨앗을 가져온 것보다 훨씬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새로운 작물을 도입하는 일은 종자를 확보하는 것뿐 아니라 재배법을 익히고 토양과 기후에 적응시키는 과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문익점과 정천익은 이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안정적인 목화 재배에 성공하였다.

 

목화 재배의 성공은 우리나라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이전에는 일반 백성들이 삼베나 모시로 만든 옷을 주로 입었는데, 이러한 옷감은 겨울철 보온성이 부족하고 제작에도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비단은 귀족과 왕실만 사용할 수 있는 고가의 직물이었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에게는 현실적인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목화가 보급되면서 솜을 이용한 따뜻한 옷과 이불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겨울철 생활환경이 크게 개선되었다. 또한 면포는 조선 시대에 화폐처럼 사용될 정도로 중요한 경제적 가치를 지니게 되었으며, 면직물 생산은 농업과 수공업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목화는 의생활뿐 아니라 경제 구조와 산업 발전에도 새로운 전환점을 마련한 작물이었다.

 

문익점은 목화 종자만 가져온 것이 아니라 방적과 직조 기술의 보급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씨앗을 솜에서 분리하는 씨아와 솜을 타는 활, 실을 잣는 물레 등이 발전하면서 면직물 생산 기술이 빠르게 향상되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서는 전국적으로 목화 재배가 확대되었고, 면포는 백성들의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의복 문화뿐 아니라 국가 재정과 상업 활동에도 큰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 경제 발전의 중요한 기반 가운데 하나로 평가된다.

 

문익점의 손자인 문승로는 이러한 업적을 더욱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는 조선 태종 때 의성 현령으로 부임하여 의성 지역에서 대규모 목화 재배를 추진하였다. 중국 금주성과 기후가 비슷하다는 점을 고려하여 의성을 새로운 재배지로 선택하였으며, 체계적인 재배를 통해 생산량을 크게 늘렸다. 의성은 이후 조선 초기 대표적인 목화 생산지로 성장하였고, 전국 각지에 종자를 보급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의성은 문익점의 업적을 계승한 상징적인 지역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면작기념비 역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오늘날 문익점 면작기념비는 단순한 기념물이 아니라 우리나라 농업기술의 발전과 생활문화의 변화를 보여 주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방문객들은 기념비와 목화밭을 함께 둘러보며 목화가 우리 사회에 가져온 변화를 이해할 수 있으며, 인근의 금성산 고분군과 연계하여 의성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함께 탐방할 수 있다. 또한 의성군은 목화를 지역의 대표 문화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며 관광과 교육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문익점 면작기념비는 한 사람의 공적을 기리는 비석을 넘어 우리나라 생활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상징하는 문화유산이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목화 종자를 들여오고, 정천익과 함께 재배에 성공한 뒤, 손자 문승로가 의성에서 이를 대규모로 보급함으로써 목화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그 결과 백성들의 의생활은 크게 향상되었고, 면직물 산업과 농업, 상업이 함께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의성의 문익점 면작기념비는 이러한 역사적 과정을 후세에 전하는 소중한 유적으로서 우리나라 농업과 산업, 그리고 생활문화 발전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역사문화유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경북 의성에 있는 문익점 면작기념비(문익점 기념비)의 주소는 다음과 같다.

주소

  •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동부로 2545
  • 지번: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대리리 381-1 문익점 면작기념비

이 기념비는 고려 말 문익점이 우리나라에 들여온 목화 종자가 그의 손자 문승로에 의해 의성 지역에서 다시 재배(재파)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현재는 의성 금성산 고분군 입구 인근에 위치하고 있으며, 뒤편에는 작은 목화밭이 조성되어 있어 문익점과 의성 목화 재배의 역사를 함께 살펴볼 수 있는 역사문화유적이다.

 

면작기념비문

 

면작 기념비 (綿作記念碑)
1935년 3월 일 경상북도지사 김서규(金端圭) 삼가 지음
우리나라가 예로부터 위인(偉人)이 많지 않다고 할 수 없으나 그 충과 효를 두루 갖춘 외에, 별도로 큰 공업(功業)이 있어 능히 우리나라를 이롭게 하고 우리 국민에게 혜택이 되게 한 사람으로 선생같이 거룩한 이 드물다.
선생의 휘는 익점(益漸)이요 자는 일신(日新)이요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다. 고려조에 벼슬하여 직위가 좌사의 우문관제학이고, 다음 조정에 와서 충선공(忠宣公)의 시호가 내리고 처음 강성군(江城君)을 봉했다가 부민후(富民候)가 추봉(追封)되었다. 평소의 언행(言行)에 있어서도 역사에 기록이 없지 않으나 특별히 표나게 들어내어 이에 크게 쓰고자 한 것은 고려 공민왕 계묘(癸卵)의 일이다.
이때 선생께서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충언(忠言)을 하다 원제(元帝)의 비위를 거슬려 남황(南荒)에 귀양을 갔다. 3년만에 귀양에서 풀려 돌아올 때 도중에 백화(白花)가 눈 같이 흰 것을 보자 그것이 목면(木綿)임을 알고는 이에 금함을 무릅쓰고 씨를 붓대 속에 넣어 돌아온 즉시 집에서 심고 이어 고을에 번식시켰다.

일찍이 관찰사가 도내를 순회하며 의성이 그 지세와 토질이 거의 교지(交祉)와 같은 것을 보고 군수(郡守)에게 적지에 파종할 것을 지시하니 군수는 즉 그의 손자 문승로(文承魯)요 그 땅은 즉 지금의 금성(金城)이다.
또한 목면(木棉)의 씨를 뽑는 물레와 실을 뽑는 물레, 사추(絲錐) 등은 대개 선생의 가정에서 만든 것인즉 선생의 공덕(功德)을 또한 가히 미루어 알겠다.
당시 우리 나라의 의복이 다만 마갈(麻葛) 모피(毛皮)만 있는 줄 알고 다른 물건이 있음을 알지 못했는데 다행히 선생의 공(功)에 힘입어 600년 간을 모든 백성들이 얼고 주리지 않았으니 이로써 논하면 후직이 곡식을 심고 서릉(西陵)이 누에를 처음 친 것과 지역을 바꾸면 다 같은 것이니 어찌 홀로 예전에만 오로지 아름답다 하리오?
또한 지금에 목면(木綿)은 비단 국민 생활의 요소가 될 뿐 아니라 장차 국가 경제의 중추(中樞)가 될 것인즉 위로 정부로부터 아래로 마을에 이르러 장려함을 소리 높혀 증식(增殖)할 바를 생각하니 전국의 사람들이 선생을 더욱 존경하고 사모하여 물이 동으로 흐르는 것처럼 생각하는 바가 사라지지 않는다. 장차 이 땅은 그의 유택(遣澤)이 근원한 곳으로 이에 중론(衆論)이 일치되어 마침내 금성면(金城面) 선전(選田) 한 구역은 목면(木棉)의 시범포이니 그 옆에 특별히 비석을 세워 간략히 전후 실적(實蹟)을 기록하였다.
그 일을 주장한 자는 군수 권중환(權重煥)이요 그 일을 도운 자는 관민과 유지(有志) 여러분이다. 또 한 그 소식을 듣고 협조하는 자 오히려 뒤질까 저어한 나머지 다투어 희사를 내어 몇 달 안에 준공을 보았다.
슬프다. 이 일 돌아보건대 어찌 족히 선생에 경중(輕重)이 되리오마는 후인들이 보고 느끼어 흥기(興起)함에는 어찌 도움이 없다 하겠는가? 내가 어릴 때부터 매양 무명옷을 입으며 목면(木棉)의 이제까지의 공을 생각하여 일찍 선생을 잊지 않았으니, 지금 마침 본 도백(道伯)으로 있으며 선생을 위하여 이 비문(碑文)을 짓게 됨을 또 다행하고 영화로움 아니리오?
드디어 중한 청을 감히 사양 할 수 없었다.

 

 

삼우당 문익점선생 면작기념비
三優堂 文益漸先生 棉作紀念碑

고려 공민왕때 삼우당 문익점선생이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3년후 귀국할 때 금주성(錦州城)에서 면화종자를 필관(筆管)에 넣어 귀국하여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으로 하여금 경남산청(山淸)에 시험재배한 것이 우리나라 면작의 시초가 되었다. 그후 조선 태종때 그의 손자 승로(承魯)가 의성현감으로 부임하여 금성면 제오리(金城面提梧里)에 면화를 파종하여 오늘에 전하게 되었으며 1909년에 지역주민들이 파종한 원전(元田)에 기념비를 세워 널리 알리게 되었다.
1991년 김우현(金又鉉)도지사 재임시 주변을 정비하고 면화를 파종하여 선생의 큰 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운다
1991년 12월 의성군수 신상철

 

木棉花記 - 秋江 南孝溫
우리 동쪽 나라에 애초에 면화가 없었다. 사람들의 의복은 명주나 삼베로 하는데 지나지 않았고, 이른바 솜이라는 것은 아떤 물건으로 만드는지를 알지 못했다. 이로움이 생겨도 부자들은 괜찮지만, 슬프게도 곤궁한 백성들은 어찌 곤란을 격으며 고생하지 않았겠는가?
고려말기 공민왕 때에 진양(晋陽) 사람 문익점(文益漸)은 성품과 행실이 착하고 공정하고 시문(詩文)이 법도에 맞고 고상하였다. 단번에 과거에 올라 사간원(司諫院) 좌정언(左正言)에 이르렀다. 조정의 잘 잘못을 알고는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지정(至正) 계묘(癸卯 1363)년에 사명(使命)을 받들어 원(元)나라로 들어 갔는데, 나라 일이 막히고 어려움을 만나 남쪽 변방으로 귀양갔다. 3년 동안 객지에서 지내다가 가을이 되어 돌아오게 되었다. 오는 길에 시골 밭을 지나가다 보니, 밭에는 눈 같은 흰꽃이 있었다. 공이 보고 기이하게 여겼는데 물어 보고서 목화라는 것을 알았다. 생각하여 말하기를 “옛시에 금강의 서쪽에 목면화가 피었네”라고 했으니 반드시 이를 이른 것일 것이다“라고 하고는 목화씨를 붓대롱에 넣어 가지고 돌아왔다. 화단에 심었더니 봄에 다섯가지 꽃이 피었고, 가을에는 흰 면화 꽃이 있었다. 이웃 사람들이 다투어 와서 보고 즐겼다. 그 종자를 얻어서 나누어 심었다. 이로부터 점점 번식하여 온 나라에 두루 퍼졌다.
아아! 문공(文公)의 은택(恩澤)은 고을로부터 나라까지 덕을 보고있고, 먼데 가까운데도 다 덕을 보고있고, 만세도록 덕을 볼 것이고, 천지와 더불어 무궁 하게 덕을 볼 것이다. 덕을 보는 것을 태산(泰山)에 견준다면, 태산으로도 더 높을 수가 없고, 강이나 바다에 견준다면, 바다가 더 깊을 수 없다. 깊고 높도 다! 백성들은 이름할 수 없도다.

[ 이 글은 행적기(行蹟記) 및 공행록(功行錄)에서 나왔는데 모두 남명(南冥)이 지은 것으로 실려 있다. 이제 문치창(文致昌)이 기록한 바에 근거하면 곧 남추강(南秋江)이 지은 것이므로 바로잡는다. 추강(秋江)과 문치창(文致昌)은 동시대 사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