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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 최부자집

great660 2026. 8. 28. 15:41

경북 경주 최부자집 네이버지도 캡처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교촌안길 19-21

 

경주 최부자(慶州 崔富者)는 조선시대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약 300년 동안 부(富)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사회적 책임과 교육, 구휼, 독립운동에 재산을 사용한 대표적인 경주 최씨 가문을 가리킨다. 흔히 ‘12대 만석꾼’이라고 표현되며, 마지막 최부자인 문파(汶坡) 최준(崔浚, 1884~1970)에 이르러 가문의 재산이 교육사업으로 전환되었다. 한국 사회에서 경주 최부자집이 특별하게 기억되는 이유는 단순히 오래 부를 축적했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부를 무제한으로 확대하지 않고 일정한 한계를 설정했으며, 흉년과 빈곤에 처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고,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광복 이후에는 교육사업에 재산을 투입했다는 점이 핵심이다.

 

경주 최부자집의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가문의 출발점에 해당하는 최진립(崔震立)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최진립은 1568년에 태어나 1636년에 세상을 떠난 인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으로 활동했으며 병자호란 때에도 전쟁에 참여하였다. 그는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에 맞서 싸우다 전사했으며, 이러한 충절의 전통은 이후 최씨 가문의 정신적 기반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최진립에서 시작된 가문의 사회적 명성과 경제적 기반은 후손들에게 계승되었고, 이후 최부자집은 단순한 지방의 부유한 지주가 아니라 일정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최부자집의 경제적 기반이 본격적으로 확대된 것은 최진립 이후의 세대부터였다. 최동량 등 후손들이 토지를 확대하면서 농업을 중심으로 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했고, 이후 최국선(崔國璿, 1631~1681) 때에는 가문의 부가 사회적 구휼과 결합하는 중요한 전통이 형성되었다. 특히 최국선은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들을 위해 죽을 끓여 나누어 주었으며, 빚을 갚지 못한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담보문서를 없앴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러한 이야기는 경주 최부자집이 부의 축적만을 가문의 목표로 삼지 않았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경주 최부자집이 오랫동안 유명하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른바 육훈(六訓)이라는 가훈에 있다. 육훈은 부를 어떻게 얻을 것인가보다 부를 가진 사람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널리 알려진 육훈의 내용은 첫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을 하지 말 것, 둘째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고 그 이상은 사회에 환원할 것, 셋째 흉년에는 남의 땅을 사지 말 것, 넷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할 것, 다섯째 며느리는 시집온 뒤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을 것, 여섯째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할 것이다.

경북 경주 최부자집(국가유산청)

 

첫 번째 가훈인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말라’는 당시 양반사회에서 상당히 독특한 원칙이었다. 조선시대에 높은 관직은 명예와 권력뿐만 아니라 가문의 경제적·사회적 영향력을 크게 확대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최부자집은 지나치게 높은 벼슬을 추구하지 않도록 했다. 이는 권력과 재산이 결합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위험을 피하고, 가문이 중앙정치의 권력투쟁에 깊숙이 휘말리는 것을 막으려는 자기절제의 원칙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이 가문은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학문을 중시하면서도 높은 관직 자체를 가문의 목표로 삼지는 않았다.

 

두 번째 원칙인 ‘만석 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라’는 경주 최부자집의 경제윤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를 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최부자집은 부 자체를 죄악으로 생각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수준까지의 부를 가문의 안정과 생활을 위해 인정하면서도, 그 이상의 부는 공동체와 나누어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 가훈은 부의 축적에 한계를 설정한 것이다. 현대적인 표현을 사용한다면 부의 사회적 책임과 재산권의 공공성을 강조한 원칙으로 해석할 수 있다. 물론 이를 현대적 복지국가의 개념과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되지만,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 일정한 도덕적 의무가 있다는 생각을 가훈으로 명시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세 번째 원칙인 ‘흉년에 남의 땅을 사지 말라’는 더욱 직접적인 경제윤리를 보여준다. 농업사회에서 흉년은 농민에게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재난이었다. 농민들이 식량과 현금이 부족해 토지를 헐값에 처분하게 되는 시기에 지주가 이를 이용해 토지를 대량으로 사들이는 것은 경제적으로는 매우 유리한 행동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최부자집의 가훈은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토지를 늘리지 말라고 규정했다. 이 원칙은 경제적 약자의 절박함을 자신의 부를 확대하는 기회로 이용하지 말라는 의미를 갖는다. 경주 최부자집의 ‘상생’이라는 평가가 이러한 원칙에서 비롯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네 번째 원칙인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는 조선시대 사회에서 가문이 수행하던 사회적 역할과 관련된다. 당시 여행자는 오늘날처럼 호텔이나 식당을 쉽게 이용할 수 없었다. 양반과 선비, 과거 응시자, 상인, 친지 등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지역을 이동했으며, 이름 있는 가문이나 주막이 이들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최부자집은 사랑채를 중심으로 과객을 받아들이고 대접하는 전통을 유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관습은 최부자집이 폐쇄적인 부자 가문으로만 존재한 것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외부인을 연결하는 개방적인 공간으로 기능했음을 보여준다.

 

다섯 번째 원칙인 며느리의 무명옷은 사치에 대한 자기절제를 의미한다. 부유한 집안의 며느리라 하더라도 일정 기간 검소한 생활을 경험하도록 함으로써 재산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도록 하는 교육적 의미가 있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가부장적 가족제도라는 시대적 한계를 함께 고려해야 하지만, 적어도 가문의 부를 다음 세대가 무분별한 소비로 탕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절제의 규범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부를 유지하는 데 있어서 돈을 버는 능력만큼 중요한 것이 돈을 절제하여 사용하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육훈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원칙이다. 이것은 경주 최부자집의 사회적 책임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가문의 부가 지역사회와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인식을 나타낸다. 특히 흉년에는 곳간을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는 전승이 오랫동안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구휼 활동은 단순한 자선에 그치지 않고 부유한 지주가 지역사회의 안정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전통적인 유교적 가치와 연결된다.

 

최부자집의 또 다른 특징은 육연(六然)이라는 수신의 원칙이다. 육훈이 가문과 재산을 관리하는 원칙이라면 육연은 개인의 마음가짐과 처신을 다스리는 원칙으로 알려져 있다. 스스로에게는 초연하고, 남에게는 온화하며, 일이 없을 때에는 마음을 맑게 하고, 일이 생기면 용감하게 대처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즉 최부자집의 가훈은 돈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에만 머물지 않고 부를 가진 사람의 인격과 태도를 함께 요구했다. 부의 지속성을 단순한 경제적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자기수양과 연결한 것이다.

 

경주 최부자집의 공간적 상징이 바로 현재 경주시 교동에 남아 있는 최씨고택이다. 이 고택은 교촌마을과 경주향교 주변에 자리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경주를 대표하는 전통가옥과 역사문화공간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고택의 사랑채와 안채, 곳간 등은 당시 양반가의 생활공간과 경제적 기반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특히 곳간은 최부자집의 재산 규모와 동시에 ‘곳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라는 사회적 문제를 생각하게 만드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최부자집의 역사에서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인물이 최준이다. 최준은 1884년 경주 교동에서 태어나 1970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12대 최부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가문의 재산을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을 위해 활용했다. 나라를 빼앗긴 상황에서 개인의 재산을 자신의 안락을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독립과 교육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러한 활동은 이전 세대에서 형성된 ‘부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정신이 근대적 민족운동의 형태로 전환된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최준의 활동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교육사업이다. 광복 이후 그는 가문의 재산을 교육을 위해 내놓았으며, 그 결과 오늘날 영남대학교의 전신이 되는 교육기관의 설립과 발전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다. 이로써 경주 최부자집의 역사는 단순히 한 가문이 부를 축적하고 유지한 역사에서 끝나지 않았다. 오랜 세월 축적된 재산을 교육이라는 공공적 자산으로 전환하면서 가문의 경제적 역사는 사실상 막을 내리고 사회적 자산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점 때문에 경주 최부자집은 흔히 한국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사회적 지위와 특권을 가진 사람에게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있다는 생각을 의미한다. 최부자집의 사례는 서양의 귀족사회에서 발전한 이 개념과 역사적 배경이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부와 지위가 큰 사람에게 사회적 책임이 따른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다. 최부자집의 가훈에는 부를 독점하지 않고 일정 부분을 사회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원칙이 반복해서 나타난다.

 

그러나 경주 최부자집을 지나치게 이상화해서도 안 된다. 조선시대의 사회경제적 구조에서 최부자집 역시 대규모 토지를 소유하고 농민과 노비를 거느린 지주 가문이었다. 최근 연구는 경주 최부자댁의 가족구성과 노비경영 등을 실증적으로 검토하면서, 이 가문을 단순히 선행을 베푼 현대적 의미의 사회사업가 집안으로만 이해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최부자집의 경제적 기반이 어떤 토지소유 구조와 노동관계 위에서 형성되었는지를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오히려 경주 최부자집의 역사적 가치를 더욱 정확하게 이해하게 한다. 최부자집의 의미는 ‘완벽하게 선한 부자’였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전근대적 부자 가문이 자신의 경제적 지위에 일정한 도덕적 한계를 설정하고 지역사회와 관계를 맺으려 했다는 역사적 사례에 있다. 따라서 그들의 가훈을 현대사회에 그대로 적용하기보다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조건 속에서 해석해야 한다. 동시에 오늘날에도 부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역사적 사례라는 점은 부정하기 어렵다.

 

경주 최부자집의 역사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은 부의 목적이 세대에 따라 변화했다는 점이다. 초기에는 전쟁과 충절을 통해 가문의 명성이 형성되었고, 이후에는 농업과 토지를 통해 경제적 기반이 확대되었다. 중간 세대에서는 흉년 구제와 과객 접대 등을 통해 지역사회와 관계를 맺었으며, 마지막 세대인 최준에 이르러서는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에 재산이 투입되었다. 결국 부가 개인의 소비와 가문의 영광에만 머물지 않고 지역사회와 민족, 교육이라는 더 큰 공동체를 향해 확장된 것이다.

 

경주 최부자집이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부자가 되는 것은 경제적 능력의 문제이지만, 부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가치관의 문제이다. 최부자집은 재산의 크기 자체를 가문의 최고 가치로 삼지 않고 재산을 관리하는 방법과 사회적 책임을 가훈으로 만들었다. ‘만석 이상을 모으지 말라’는 원칙과 ‘사방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원칙은 부의 축적과 사회적 분배를 하나의 윤리적 질서 안에서 연결한 것이다.

 

오늘날 경주 교동의 최부자댁을 방문하는 것은 단순히 오래된 한옥을 구경하는 일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조선시대 양반가의 생활공간뿐 아니라 약 300년에 걸쳐 이어진 한 가문의 경제사와 사회사, 그리고 마지막에 그 재산이 독립운동과 교육사업으로 전환된 근현대사의 흔적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최부자집은 건축물인 동시에 하나의 역사적 기록이며, 부와 권력, 교육과 사회적 책임이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문화유산이다.

 

결국 경주 최부자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졌는가’가 아니라 그 재산을 어떤 원칙으로 다루었는가에 있다. 12대에 걸쳐 만석꾼이라는 경제적 지위를 유지했다는 사실은 놀랍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의 한계를 설정하고, 흉년의 약자를 이용하지 않으며, 과객을 대접하고, 굶주린 사람을 구제하고, 마지막에는 독립과 교육을 위해 재산을 내놓았다는 가문의 전통이다. 동시에 이러한 전통을 당시의 지주제와 신분제라는 역사적 조건 속에서 비판적으로 살펴볼 필요도 있다. 경주 최부자집은 바로 이 두 가지 시각, 즉 역사적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부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하는 시각을 함께 가질 때 가장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경주 최부자는 단순한 ‘옛날의 부자’가 아니라 한국 역사에서 부와 윤리, 재산과 공동체, 개인의 성공과 사회적 책임이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매우 독특한 역사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경주 최부자댁의 현재 주소는 다음과 같다.

  • 도로명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교촌안길 19-21
  • 지번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69
  • 전화: 054-774-0202
  • 관람시간: 09:30~17:30
  • 휴무: 매월 마지막 월요일
  • 입장료: 무료

다만 경주시 관광 안내 자료에는 교촌안길 27-44 또는 27-40으로 표기된 자료도 남아 있어 주소가 혼재하다. 경주시의 최근 관광 페이지는 교촌안길 19-21을 위치로 안내하고 있으므로 방문할 때는 이 주소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좋다.